청와대가 뜨겁습니다. 문자 그대로 핫플이 됐습니다. 정치 권력의 대명사로 엊그제까지 뉴스에 오르내리던 곳이 갑자기 대한민국의 관광 명소가 되었습니다. 5월 10일부터 청와대를 향하는 수백 수천의 인파가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끝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권력의 새 자리는 용산이 떠안게 되었습니다. 하루 아침에 대통령 집무실과 직속 행정 조직이 빠져나가면서 본래 기능이 멈췄지만, 청와대라는 장소를 정치와 분리해서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청와대를 국민의 품으로’라는 구호도 단순히 장소의 변화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복잡한 정치적 사회적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청와대로 대변되었던 대통령의 공간이 앞으로 어떻게 생성되어갈지, 권력의 상징이었던 청와대는 앞으로 어떤 장소로 변모해갈지, 정치적 장소와 도시적 공간의 좌표 이동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런 커다란 힘의 역장 속에 공백이란 존재할 수 없고, 무엇인가 빠져나간 자리에는 다른 무엇이 흘러들기 마련입니다. 한동안 온갖 크고 작은 힘들이 모여드는 혼돈의 상태가 지속될 것이고, 어느 시점에는 어떤 모습으로든 힘의 균형 상태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날, 청와대는 어떤 공간이 되어 있을까요? 거기에 쌓인 시간은 어떻게 갈무리해야 할까요? 그곳이 진정 시민의 것이라면 우리는 거기서 무엇을 하면 좋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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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에는 두 개의 미디어가 있습니다. 포럼과 신문입니다. 이미 아시다시피, 이 둘은 서로 연동되어 돌아가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뉴스레터 지면에 여유가 생긴 김에, 오늘은 이 둘이 연결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조금 풀어보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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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의 조건들이 있습니다. 궁극의 조건, 곧 질문은 이것입니다. 신문은 '정보'가 되어야 할까요, '콘텐츠'가 되어야 할까요? 정보이기도 하고 콘텐츠이기도 해야겠죠? 구분은 쉽지 않고, 무용해 보이기도 합니다. 저 혼자의 생각일 수도 있고요. 질문을 살짝 바꿔보겠습니다. 신문은 배포되어야 하나요, 판매되어야 하나요? 좀더 부연해보면, 불특정다수에게 무료로 공개하는 것이 좋을까요, 타겟 독자에게 값을 매겨 유통하는 것이 좋을까요? 이왕이면 무료 콘텐츠가 좋은 것 같다고요? 그렇다면 재미있는 무료 콘텐츠가 얼마나 있던가요? 생각을 거듭하다 보면 신문은 콘텐츠에 발목 잡힌, 콘텐츠에 갇힌 정보입니다. 신문의 파급력은 확산(배포)에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비용이 들고, 그것은 콘텐츠 판매로만은 충당하기가 버거울 뿐 아니라, 확산되어야 할 정보가 콘텐츠 속에 갇히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신문이 광고라는 우회적인 장치를 만들었지만, 그 역시 자기 자신을 패러독스로 밀어 넣는 일이 됩니다. 상충하는 조건들 사이에서 꼼짝못하는 상태는 세상 모든 '신문'의 숙명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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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의 조건들도 있습니다. 재단의 포럼은 강연과 토론 사이 어떤 지점에 있습니다. 강연이기도 하고 토론이기도 하고, 그 말인즉슨 둘 다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포럼은 일목요연하지 못하고, 의식과 대화의 흐름대로 이루어집니다. 또 포럼은 한정된 공간과 한정된 시간 안에서 열렸다 닫히기를 되풀이하는, 잠시 생겼다가 없어지는 이벤트입니다. 자리가 파하면 그 자리에서 나눈 이야기도 함께 사라지죠. 무대 위의 공연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포럼의 파급력은 바로 그 현장성에 있고, 포럼의 존재 이유는 결국 모여서 뭔가를 함께 이야기하는 데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무형의 경험과 가치를 추종하고, 그에 대한 일정한 대가를 인정합니다. 그것이 텍스트와 다른 말의 힘이고, 종이 위에는 없는 현장의 힘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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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포럼과 신문을 연결해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신문은 혼자서 지속될 수 없고, 포럼도 혼자서는 일시적 일회성 상태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었습니다. 적어도 이 둘이 자리 잡고 있는 환경과 안에서는요. 하지만 이 둘이 연결됨으로써, 포럼은 신문이 콘텐츠라는 틀에 갇히지 않게 해주고, 신문은 포럼의 목소리가 휘발되지 않게 해줍니다. 포럼이 토론을 하면, 신문은 기록을 하고, 포럼이 입력 장치라면, 신문은 출력 장치이고, 포럼이 취재국이라면, 신문은 편집국이 됩니다. 전혀 다른 두 개의 미디어가 하나로 합체하여 하이브리드 미디어가 되었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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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브리드’, 그리 신선한 단어는 아닙니다. 21세기가 막 시작할 때 즈음에는 첨단의 단어였으나, 나오자마자 여기저기(아무데나) 쓰이면서 단어에 담긴 힘(의미)이 빠르게 소진되었죠. 그러다가 2010년 무렵 하이브리드 자동차가 시장에 나오면서 다시 소환되었는데, 쓰임의 맥락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전에는 새로운 종이나 물체의 인위적 생성이라는 문맥에서 ‘혼종’, ‘합성’의 뜻으로 주로 쓰였는데, 다시 등장했을 때는 본래의 의미 자체보다 그로 인한 효과, 즉 높은 에너지 효율과 오랜 지속성을 달성하는 방식을 먼저 떠올리게 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럴싸한 유행어로서의 수명은 다하고, ‘하이브리드’라는 방법이 가져다준 실질적 효용이 의미의 좌표를 바꾼 셈입니다. 물론 이런 설명은 이 문단을 벗어나는 순간 유효하지 않을지 모르죠. 아무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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